'15.12.03고소도노쇼

공공기관도 몸살 

고소해놓고 안 나타나고… 정보공개 자료 600만장 안 찾아가고…


조선일보 발행일 : 2015.12.03 / 종합 A8 면 

아무 연락도 없이 예약을 깨버리는 한국인들의 '예약 부도(No-show·노쇼)' 행태는 공공 기관 서비스를 이용할 때도 일상화돼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여는 각종 강좌 참가 신청은 순식간에 정원이 차 마감되지만, 실제 강좌가 시작되면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이 때문에 담당 공무원들은 막판까지 신청자들의 참석 여부를 확인하느라 끙끙댄다. 경찰도 고소를 해 놓고 정작 조사 날짜가 되면 나타나지 않는 고소인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고소해 놓고 나타나지 않는 고소인들

"'한시가 급하다'고 해서 일정을 앞당겼는데 인제 와서 못 온다고 하면…." 지난달 5일 오전 10시 서울의 한 경찰서 경제팀 수사관 이모 경위는 전화통을 붙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경위는 이날 오전 10시 30분에 "지인이 1억원을 빌려 놓고 2년째 갚지 않고 있다"며 고소장을 낸 A씨를 조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일주일 전 일정을 잡은 A씨는 조사 30분 전에 전화를 걸어와 "급하게 해외여행을 가게 됐으니 고소인 조사는 다음에 하자"고 통보했다. 이 경위는 "오늘 증인과 피고소인 조사도 마치려 했는데 고소인 조사를 못 하게 됐으니 하루를 공치게 됐다"고 했다.

서울 일선 경찰서의 수사관 한 명에게 배당된 사건은 평균 30~60건에 달한다. 사건이 수북이 쌓여 있다 보니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해선 조사 일정을 빈틈없이 짜야 한다. 특히 고소·고발 사건이 많은 경찰서 경제팀은 사건 관계자들을 조사할 때 예약제를 실시하고 있다. 수사관이 사건 당사자와 일정을 조율해 조사를 진행하는 식이다. 하지만 본지가 서울 지역 경찰서 수사관 15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지난 10월 한 달간 약속 시간에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은 사건 관계인은 19%(총 64명 중 12명)에 달했다. "사건을 빨리 처리해달라"고 재촉하는 고소인일수록 약속한 일정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서울의 한 경찰관은 "수사하는 것보다 약속한 날짜에 나타나지 않는 사건 관계인과 전화로 일정을 다시 잡는 게 더 골치 아플 정도"라고 했다.

◇정보 공개 청구 5건당 1건 '노쇼'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1998년 도입된 정보 공개 청구 제도도 '노쇼' 청구인들 때문에 행정력 낭비에 시달린다. 정보 공개 청구는 인터넷 '정보공개 시스템'에 접속해 신청할 수 있다. 해당 관청이 공개하기로 결정한 정보를 자료 형태로 준비하면, 청구인은 일정 수수료를 내고 찾아간다. 홈페이지에 접속해 파일 형태로 다운을 받거나 종이 출력물로 받아갈 수 있다.

청구인은 정보량을 기준으로 A4용지 한 장은 300원, 이후 한 장이 추가될 때마다 100원씩의 수수료를 낸다. 100장이면 수수료는 1만200원이 된다. 전자파일로 받으면 1MB 이내는 무료이고 그 이상은 1MB마다 100원씩 추가된다. 하지만 준비한 자료를 찾아가지 않은 청구인이 적잖다. 행정자치부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정보 공개가 결정된 90만7966건 중에서 청구인이 찾아가지 않아 캐비닛에 처박혀 있는 자료가 15만3000여 건(17%)에 이른다. A4용지로 환산하면 600만장에 이르는 규모이다. 이 때문에 받지 못한 수수료도 6억6000만원이나 된다.

행정력 손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분석한 결과, 정보 공개 청구 자료 1건을 만들려면 공무원 1명이 평균 3시간가량을 일해야 한다. 정보 공개 업무를 주로 맡는 7·8급 공무원의 시간당 평균 임금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1건당 4만1400원의 인건비가 드는 셈이다. 여기에 지난 3년간 청구인이 찾아가지 않은 자료 건수 15만3000건을 곱하면 행정력 손실 규모는 63억여원에 이른다.

예약 부도를 줄이기 위해 일본은 정보 공개 신청을 할 때 수수료 일부를 먼저 내게 하고 자료를 받을 때 나머지 수수료를 내게 한다. 일종의 예약금을 받는 것이다. 미국도 정보 공개 청구를 해놓고 찾아가지 않은 전력이 있는 청구인에 대해선 수수료 전액을 미리 내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행정자치부 관계자는 "우리는 정보 공개 청구인에게 예약금이나 위약금을 받는 건 엄두도 못 낸다"고 했다. 자료를 찾아가지도 않으면서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것 아니냐'며 반발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출처
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Y=2015&M=12&D=03&ID=2015120300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