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0.22잘못된노쇼인식

스타 셰프도 '노쇼' 죽을맛… "뉴욕 식당이라면 펑크내겠어요?"

조선일보 발행일 : 2015.10.22 / 사회 A12 면 

요즘 '쿡방(음식 방송)'이 시청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면서 일부 셰프는 연예인 못지않은 유명세를 누리고 있다. 더불어 이들이 직접 요리하는 가게를 찾는 손님도 많아졌다. 그러나 이 스타 셰프들이 운영하는 식당 역시 예약을 해놓고도 아무 연락 없이 나타나지 않는 '노쇼(no-show)' 손님들을 피해가진 못하는 모양이다. 이연복, 최현석, 에드워드 권 등 스타 셰프 3명이 한국의 후진적 예약 문화의 실태와 그 해법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목란' 이연복 셰프] "예약시각 지나도 안 와 전화하니 발뺌"

10여년 전 중식당을 했던 한 지인의 이야기다. 15명이 코스 요리를 예약하고선 당일이 돼서도 연락이 없었다. 식당 주방에선 이들을 위해 준비한 동파육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예약 시각이 한참 지나서야 연락이 닿은 이들은 태연하게 "우리가 예약했었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들은 다른 호텔 식당에서 식사 중이라며 다른 손님을 받으라고 짜증을 내더란 것이다.

선진국 문턱에 올라선 지금, 한국의 예약 문화는 개선됐을까? 그간 한국의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했지만, 주변 동종 업계 사람들의 한탄을 듣노라면 우리의 예약 문화는 제자리걸음하고 있다. 인터넷·SNS 등에서 여러 곳에 중복 예약한 뒤 한 곳만 골라서 가면 된다는 '예약 쇼핑' 식 후기를 보면 오히려 후퇴한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해야 손님들이 예약을 지킬까. 몇 해 전부터 나는 예약 손님들에게 '2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으면 예약이 자동으로 취소된다'는 문자를 보내고 있다. 20분 뒤엔 예외 없이 다른 손님을 받는다. 고객이 항의하면 "저희가 시간을 알리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이렇게 했더니 뒤늦게 나타난 '애프터쇼(after-show)' 고객들도 강하게 항의하지 못했다.

중국에 '언불신자행불과(言不信者行不果)'라는 말이 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뜻이다. 한국의 노쇼 고객들에게 빗대어 보면 약속을 가볍게 보면 불이익은 고객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게 된다는 뜻이 되지 않을까. "식당 예약 펑크낸 걸 갖고 뭘…" 하는 생각, 이제는 버려야 한다.

['엘본더테이블' 최현석 셰프] "생계 달린 문제, 그냥 넘겨선 안돼"

한국에선 예약을 어기고도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고객이 많다. 그러나 식당을 하는 셰프들은 예약 부도(不渡)를 단순히 고객의 '에티켓' 문제로 보아 그냥 넘길 수 없다. 가게의 생존을 위협하는 절박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생계가 위협받는 문제라면 이것은 사회적 문제로 봐야 한다.

실제 식당을 운영하다 '노쇼' 손님들 때문에 영업이 악화해 문을 닫은 지인이 주변에 여럿 있다. 내가 운영하는 레스토랑도 매일 1~2건의 '노쇼' 고객을 맞는다. 한 달치 예약이 꽉 차 있어도 그렇다. 고객에게 항의할 수도 없다. SNS에 '악성 게시글'이 올라오고 순식간에 확산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노쇼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셰프들은 요즘 신문·TV·라디오에서 각광받고 있다. 지금처럼 셰프가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때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나도 TV 요리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미식(美食) 문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나날이 높아지는 걸 실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대중적 관심을 보면서 갖게 된 의욕은 노쇼 손님을 접하면 이내 사그라진다. 이런 분위기에서 셰프들은 손님들에게 만족감을 줄 음식을 만들 자신이 없어질 수밖에 없다.

예약 부도를 줄이기 위해선 예약금 제도가 정착돼야 한다. 한국 손님들은 "아직 먹지도 않은 음식값을 왜 미리 내야 하느냐"고 되물을 것이다. 하지만 예약금은 수익을 더 올리기 위한 상술이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겠다. 대신 꼭 약속 시간에 와달라"는 것은 고객에게 당부하고 싶은 최소한의 요청이다.

['랩24' 에드워드 권 셰프] "늦게 와 큰소리… 샴페인까지 꺼내 사과"

미국에선 식당에 예약 없이 찾아오는 사람을 '워크인(Walk-in)' 손님이라 부른다. 이런 손님들은 대개 식당 종업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혹시 빈자리가 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정말 죄송하지만…"이라는 표현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정성스러운 한 끼 식사를 준비하는 셰프들에 대한 존중이 있는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모습이다.

한국은 다르다. 한국에서는 고객이 왕이다. 특히 예약을 어긴 고객들도 '왕 대접'을 바란다. '예약 시간 10분 전이라도 취소 전화를 해줬으니 감사하게 여기라'는 고객도 적지 않다.

몇 달 전 예약했던 5인 가족이 예약 시간이 다 돼도 나타나지 않았다. 수차례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냈지만 응답이 없었다. 30분쯤 테이블을 비워놓았다가 대기 손님에게 자리를 넘겼다. 그로부터 한 시간 반이 지나고 그 노쇼 고객이 나타났다. 당연히 자리가 없었다. 그러자 한 남성이 "고객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냐"고 소리쳤다. 우리는 그들에게 샴페인까지 따라주며 사과해야 했다.

예약 부도를 줄여보고 싶었다. 그래서 예약하는 고객에게 신용카드 정보를 요구했더니 "일개 식당 주제에…"라고 말하는 고객도 있었다. 해외의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이런 식으로 식당을 힐난하는 고객은 드물다. 식사 예약은 한 테이블에 대해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요청이다. 권리에는 책임도 따른다. 레스토랑이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사전 정보와 함께 약속을 지키는 신뢰를 주는 것은 손님의 몫이다. 한 손으로 박수를 칠 수는 없지 않은가.

출처
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Y=2015&M=10&D=22&ID=2015102200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