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0.15노쇼피해악순환

저 12시 예약인데… 헐레벌떡 맞춰 와도 하염없이 기다린다

병원 등 '노쇼' 손해 줄이려 오버부킹… 예약 지킨 손님만 피해보는 '악순환'

조선일보 발행일 : 2015.10.15 / 종합 A8 면 

한국에선 예약을 깬 손님이 별 피해를 보지 않는다. 아무 연락 없이 예약을 어기고, 예약 시간 몇 분을 남겨놓고 취소해도 상당수 서비스 사업자는 고객에게 책임을 묻지 못한다. 업소에서 예약금을 받지도, 위약금도 물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피해는 예약 부도로 매출 손실을 보는 업소만 당하는 게 아니다.

실제 '노쇼(no-show·예약 부도)'로 한산할 것 같아도 제시간에 업소를 찾은 예약 손님이 기다려야 할 때가 적지 않다. 예약을 펑크 내는 손님 때문에 사업자들이 자구책으로 '오버부킹(초과 예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예약 시간을 넘겨 나타나 자리를 요구하는 '애프터쇼(after-show)'도 한몫한다. 예약을 지키는 손님이 불이익을 당하는 구조다.

지난 7일 오전 10시 서울 강동구의 한 척추 관절 전문 병원. 진료 접수대 앞에서 한 60대 남성이 "당장 의사 나오라고 해!" 하며 소리를 질렀다. 직원 한 명이 "진정하라"고 하자 그는 "아픈 사람이 먼저 치료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삿대질을 했다. 이 남성은 원래 이틀 전 오전에 진료를 받기로 예약돼 있었다. 예약 당일엔 나타나지 않더니 이날은 '무릎 연골 주사를 맞아야겠다'며 무작정 병원을 찾아와 떼를 쓰는 중이었다.

결국 병원 측은 다른 환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 남성을 진료실로 데려갔다. 이를 지켜보던 한 예약 환자는 "예약을 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고 말했다. 50병상 규모의 이 병원은 예약 진료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매달 예약 인원의 20~25% 정도가 이 남성처럼 아무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거나 뒤늦게 나타나 떼를 쓰는 바람에 예약 진료는 말 그대로 원칙일 뿐이다.

이 병원 이모(38) 과장은 "어떤 날은 예약 환자의 태반이 안 오다가도, 어떤 날은 예약 안 하고 찾아와 당장 진료해달라고 요구하는 환자가 생기니 예약 순서가 뒤죽박죽이 된다"고 했다.

이날, 이 병원 접수처 직원들이 오전 9시부터 10분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예약 환자 이름을 2~3번 크게 불렀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 시간 동안 예약 환자 15명 중 3명이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 5월엔 한 중년 남성이 허리 디스크로 신경 성형술을 받겠다고 예약해놓고 나타나지 않았다. 수술 준비를 다 마친 병원 측이 급하게 연락했지만 이 환자의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병원 측은 결국 500만원에 이르는 수술용품을 폐기했다. 카테터(얇은 관 형태의 의료 기구) 같은 수술 기구는 멸균 팩에서 한번 꺼내면 다시 사용할 수 없다.

이렇다 보니 식당, 일반 병원, 미용실 등은 예약 부도에 따른 경제적 손실을 줄이려고 정원을 넘겨 예약을 받고 있다. 대체 업소가 많아 손님이 언제든 다른 업소로 옮겨 갈 수 있는 이런 업종은 손님의 심기를 거스르면서 예약금이나 위약금을 받기 어렵다. 사람 생명을 다루는 병원은 예약 시간에 지각한 환자라고 진료하지 않고 돌려보내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람이 아프다는데 병원이 환자를 내팽개친다"는 민원이 돌아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오버부킹은 고객에게 예약 파기 책임을 묻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온 고육책인 셈이다.

문제는 초과 예약을 받았다가 예약 고객이 몰릴 때 생긴다. 서비스 한도를 넘는 사람이 몰리면 대기 시간이 길어지고 서비스 시간은 짧아질 수밖에 없다. 서울 서초구의 한 대형 미용실은 예약 정원의 10%를 오버부킹하고 있다. 이 미용실 관계자는 "결국 예약 시간에 맞춰 온 손님들도 기다려야 하거나 미용 시간이 줄어드는 등 어떻게든 피해를 본다"고 했다.

이날 오전 서울 강남의 한 병원에선 진료실에서 의사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진료실 밖 복도에서 진료 순서를 기다리던 50대 여성이 "예약 시간이 30분이나 지났는데 의사가 어디 가느냐"고 따졌다. 간호사가 "환자 주사를 놓으러 갔다"고 설명하자 이 여성은 "그 사람은 누군데 예약한 나보다 먼저 치료를 받느냐"고 받아쳤다.

병원 관계자는 "손님들의 성화가 거세지면 진료 시간도 5분에서 3분으로 짧아지는 등 서두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 대형 미용실 관계자도 "오버부킹한 예약 손님이 갑자기 몰릴 때는 잔머리 가다듬기를 대충 해서 서비스 시간을 억지로 줄이고 있다"고 했다.

출처
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Y=2015&M=10&D=15&ID=201510150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