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2.17잘못된갑질문화

노쇼 부추기는 VIP

VIP들의 '노쇼 甲질'… 식당들 "단골이라 항의도 못해요"

조선일보 발행일 : 2015.12.17 / 종합 A8 면 

기업이나 관공서의 단체 예약을 직접 하는 사람은 주로 부서의 막내 직원이나 비서들이다. 하지만 이들에겐 예약 시간·장소를 선택할 권한은 없다. 임원이나 간부들이 정하기 때문이다. 대기업 신참 직원 박모(30)씨는 "사실 '대충 적당한 곳으로 잡으라'는 상사의 지시를 받고 일단 예약은 해두지만, 막판에 '거기 말고 여기 가자'고 해 바꾼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했다. 신참 직원 입장에선 상사가 뭘 좋아할지 몰라 식당 여러 곳에 중복(重複) 예약을 하는 경우도 잦다. 결국 상사가 막판에 선택한 식당을 제외한 나머지 식당들은 속수무책으로 '노쇼(No-show·예약 부도)'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분 따라 식당 정하는 상사는 '노쇼 유발자'

지난달 19일 오후 7시 20분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고깃집. 인근의 한 대기업 직원 30여명이 7시까지 오기로 예약했지만, 예약 시간 20분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식당 직원들은 고기를 미리 썰어놓고 국과 밑반찬도 상에 차려놓은 상황이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사장 이모(여·42)씨는 예약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다른 식당에서 식사하고 있었다. 이 식당에 예약했던 기업 임원의 비서는 "저희 전무님이 급작스럽게 중국음식점으로 하자고 해 다른 곳을 급하게 예약하느라 미처 취소 전화를 못 했다"며 쩔쩔맸다. 이씨는 "예약하는 사람 따로 있고, 취소하는 사람도 따로 있는데 막내 직원한테 항의해봤자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

서울 여의도의 한 금융 회사에 다니는 이모(여·25)씨가 일하는 부서의 부장은 퇴근 30분 정도를 남기고 팀원들과 '번개회식'을 잡기로 유명하다. 이럴 때 예약은 부서 막내인 이씨 몫이다. 이씨는 "부장이 퇴근 시간이 임박해 '오늘 퇴근하고 저녁이나 하자'고 하면 일단 손님이 적은 인기 없는 식당에 예약부터 걸어놓고, 진짜 갈 만한 식당에 자리가 있는지 확인한다"고 했다. 상사의 기분에 따라 예약을 잡다 보니 여기저기 중복 예약을 걸어놓고, 예약 시간을 코앞에 두고서 가지 않을 곳에 취소 전화를 하거나 아예 연락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식당들 "뭐라 항의할 수도 없고…"

대기업이나 관공서가 몰려 있는 빌딩가 주변 식당들에게 직장인이나 공무원 손님은 '갑(甲) 중의 갑'이다. 주 고객인 이들이 예약만 해놓고 나타나지 않아도 항의할 엄두를 내기 어렵다는 게 음식점 업주들의 말이다. 항의했다가 나쁜 소문이라도 돌면 영업에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에서 레스토랑을 하는 서모(36)씨는 지난 8월 예약을 하려는 대기업 임원 비서에게 "이번에는 진짜 올 거냐"고 물었다가 핀잔만 들었다. 이 임원은 이 레스토랑에 예약해놓고 아무 연락도 없이 깬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서씨는 "혹시 이번에도 노쇼 때문에 피해를 보지 않을까 걱정이 돼 예약 확인차 물었더니 '우리가 갈 데가 당신네 레스토랑밖에 없는 줄 아느냐'며 되레 고함을 치기에 황당했다"고 말했다.

이런 손님들은 실제 올 사람보다 예약 인원을 한참 더 부풀려 예약하기도 한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서 고깃집을 운영하는 김모(57)씨는 "'○○○ 사장님 저녁이니까 좌석을 넉넉하게 비워달라'는 식의 예약은 대개 예약한 인원보다 훨씬 적은 수의 손님이 오는 경우가 많다"며 "'정확히 몇 명이 올 건지 알려달라'고 하면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느냐'며 도리어 역정을 낸다"고 했다.

이 때문에 서울의 주요 빌딩가 식당들 사이에선 요주의 기업·관공서 명단, 요주의 임원·간부 명단도 돈다고 한다. 서울 중구 서린동의 식당 주인 성모(43)씨는 "'이 회사 어떤 팀은 노쇼가 많다' '인근 구·시청의 어떤 부서는 예약 인원보다 훨씬 적게 온다'고 메모를 해둔다"며 "이런 손님들이 예약하면 해당 시간대에 다른 손님들의 예약을 더 받아놓고 노쇼에 대비한다"고 했다. 서울 강남구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이모(51)씨는 "인근에 있는 외국계 회사 CEO들은 예약 인원이 1~2명만 바뀌어도 예약 전담 직원이 매번 전화해서 '인원이 조정됐다'고 알려준다"며 "밥 먹을 시간과 인원을 미리 정해서 알려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며 한숨을 쉬었다.

출처
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pdf_ReadBody.jsp?Y=2015&M=12&D=17&ID=2015121700219